(11월 15일에 올렸던 글에 이어서.)
이 설악산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커다란 매력이 있으니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라도
좋아라.
새벽 5시에 길을 나섬에 겨울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지만 하얀 눈이깔린 등산로는
밝히는 불이 없어도 갈만할만큼 지장이 없더라.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등산로를따라 계곡을 오르매 그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던지 눈은 꼭꼭 밟히어져 굳어있어 스패츠를 한 발목이 공연히 미안하다.
그래도 밟혀 굳어진 두께가 거의 1m에 가까우니 만약 사람들발에 밟히지 않았더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눈일지 짐작도되지 않는다.
집안에 혼자 있을때는 그리도 쓸쓸하고 썰렁하더니 산에서는 혼자라도 이리 좋아라.
신바람에 사로잡혀 힘차게 걷다보니 어느덧 비선대를지나 금강굴 곁을지나서 마등령에
올라섰다.
날씨도 워낙 추운 날이지만 거기에 바람이불어 체감 온도는 거의 - 30℃ 정도 되련가?
방한 마스크위로 황소같이 내뿜은 콧김 수증기는 눈썹에 엉기어 얼어대니 눈을 감았다
뜰때마다 눈꺼플을 잡아 당긴다.
마스크를 뚫고 앞으로나온 수증기는 어느새 고드름을 만들고 있었고 어느덧 동녘에는
커다란 햇님이 얼굴을 내밀어 밝은빛이 온누리에 퍼지니 눈이 부시어 고글을 꺼내썼다.
그렇게 마등령을 지나서 신선대에 다다라 주변 바위를 둘러보니 눈에 덮인것 말고는
작년가을에 아내와 같이와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바라보던 그 바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긴, 강산이 하루아침에 그 형상이 변하는게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일인가?
그저 그냥 바위일 뿐인데 작년과 그 이전에보던 그런 분위기와는 좀 다른 기분으로 그 바위를
바라보는 지금의 이 분위기 말이다.
뭐랄까?
약간의 귀기(鬼氣)같은거랄까?
어째 좀 음산함 같은걸 느끼는건 아무래도 이 깊은 산중에 혼자있기에 그 적막함이 그런
두려움 비슷한 기분까지 들게 하는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바위를 지나치면서도 뭔가 자꾸만 뒷꼭지를 잡아 당기는듯한 착각을
느끼며 바위를 지나쳤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앞으로 가벼이 떨어지질 않는다.
왜?
뭐야? 이건.
사실 이런 큰산에는 언제나 아내와 함께왔지 혼자 온것은 처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그리 겁이많은 사람은 아닌데 다른곳에서는 느끼지못한 이 두려움 같은건 도대체
왜 생기는걸까?
정말 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에 뒤돌아서서 그 바위들을 세세히 바라보았다.
아, 그랬더니 여태껏 그냥 지나치느라 보지못했는데 그늘진 바위의 틈새로 가느다란 햇빛이
스며나와 긴 빛줄기를 만들고 있었고 그 틈은 사람 하나가 들락 거리기에 충분한 넓이로
벌어져 있었는데 그 틈을 본순간 나도몰래 커다란 호기심이 발동한다.
다시 뒤돌아 그 바위틈으로 들어가 바위를 돌아드는데 이런...
햇빛이 따스히 내리쬐는 약간의 공터끝에 비죽이 나와있는 등산화를 신고있는 발 하나.
혹시 이 겨울날에 조난 당한사람이 여기에서?
그렇다면 그사람은 지금 살아있는건가? 아니면?
앞으로 두어발짝만 더 떼어 나가면 그사람을 볼수 있을텐데 선뜻 발걸음이 앞으로 더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잠시 벌어 졌지만 그래도 어쩔것인가.
설사 이사람이 잘못되어 있더라도 기왕 보았으니 그냥 갈수는 없는것 아닌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할일은 해야 할것이란 생각으로 두려움을 억지로
떨쳐버리고 앞으로 나가보았다.
아,
그곳에는 햇빛이 따사롭다 하더라도 이겨울 산속의 추위를 얼마나 누그려 뜨릴것인가.
그래도 햇빛을찾아 이곳에 웅크리고 추위를 참아내고 있었던가?
자그마한 여인하나가 잔뜩 웅크린 자세로 깜짝놀라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런데 그 여인은 바로 어제 오후에 호텔에서 커피한잔 할때에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여인이
아닌가.
이것도 인연이라면 뭐 이렇게도 고약한 인연이 있단말인가.
두려움에 가득했던 그 여인의 표정은 내가 고글과 방한 마스크를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그래도
한번 보았던 구면(?)이란 생각인지 어느정도 풀어진다.
그 여인을 내려다보던 나는 슬슬 올라오는 신경질에 화가 치밀어 오름을 참기가 어려워진다.
도대체 이여인이 얼마나 산을 가볍고 우습게 봤으면 저런 복장과 장구정도로 이런산을 함부로
올랐단 말인가 해서였다.
어제 오후에도 약간의 화장은 하고있었지만 오늘은 무슨 맞선이라도 보러가려 했던가?
짙게는 아니지만 제법 정성들인 화장에다 또 이 복장상태는 뭔가?
제법 가격좀 나가는 메이커라 하지만 방한복은 제대로 입었다 하더라도 날씬한 각선미를
자랑이라도 하려했던가?
겨울등산용 좁은 쫄 바지안에는 방한 내의를입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모자도 제법 두툼하긴 하지만 귀마개도 없는것이고 마스크는 어디 먼지라도 휠터링 하려고
했는지 그저 일반 마스크 아닌가.
아이젠도 발 중간에 끼우는 약식인데다 이런 눈산에 오는 사람이 스틱은 어째 한개만 가지고...
내가 동네산에 갈때에도 아무리 산이 작아도 산은 산이니( 음.... 물도 있구나) 거의매일 운동하러
갈때에도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방한 장비도 잘 챙겨입고 가는데 이여인은 도대체
산을 얼마나 가벼이 봤으면 감히 이런 정도의 장비로 이 큰산을 겁도없이 올랐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그렇게 신경질이나 부리고 있을때가 아니니 우선 조치를 취해야 하였다.
추위에 얼어있는 사람에게 그동안 태권도를 익히며 함께 단련했던 기 운용으로 간단한 응급
처치를 한다음 배낭에서 여벌로 준비해온 장비들을 꺼내어 그여인에게 내밀었다.
우선 위옷 겉방한복을 벗으라하여 벗은걸보니 이런 사람하고는.
그 방한복안에 입은 것이라곤 그저 두툼한 티셔츠한장.
물론 그안에는 또 다른걸(?) 착용하고 있겠지만 그건 방한과는 관계가 없을것이고.
참 한심하단 생각은 잠시 젖혀두고 두툼한 방한 조끼를 꺼내주어 입게하고 아래쪽 방한
팬츠를 꺼내주니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것을본 내가 참다못해 소리를 버럭 질러버렸다.
"아니, 지금 체면이 문제욧!"
"어서 바지안에 그걸 입으란 말이요."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를 보면서 잠시 생각하니 참내.
나도 그렇지.
아무리 상황이 다급해도 이제 두번째보는 외간 남자 앞에서 어찌 여인이 바지를 벗는단
말인가.
무슨 엉큼한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슬그머니 돌아 앉았고 돌아앉은 뒤쪽에선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벗는 소리는 다 이런건가?
등산 바지를 벗는 사라락 소리조차 비단치마 내리는 소리로 들리니 원.
그외 양말이며 방한 마스크에 스패츠에 장갑 등등 챙겨 입히며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여기에서 이런일이 생기리라 그렇게도 꿈속에서 애절하게 불러대었고 설악산에 오고
싶었고 등산 장비도 더 챙겼고 그래가지곤 이곳에서 이런일을 하고있단 말인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것인지 내자신을 이해할수가 없었다.
다 입히고 챙겨 착용해줄때쯤 이 여인은 추위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벌써?)
하산길을 의논하게 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 반은 와버렸으니 되돌아 가자니 또다시 가파른 등산로요 앞으로 가자니 그또한
험하긴 하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아무래도 회운각을 거쳐서 천불동 계곡으로 갈수밖에
없게되었다.
여인에게 경로를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처분만 바란다는 태도인데 기가 막힌건
평소에 산은 좋아하고 이산에도 와봤지만 이산뿐만 아니라 다른산에도 이런 겨울산행은
처음 해보는 쌩 초보란다. 내참.
정말 겁이라곤 애초부터 어디에 버렸기에 감히 이런 겨울에 이런산엘 이런 장비로....
한번 혼좀 내리라 생각은 들지만 지금은 우선 이 산을 벗어남이 급선무라.
헉헉 거리며 겨우 발걸음을떼는 여인을 부축하고 당기고 잡아주며 산을 내려오는데
내 생전에 이렇게까지 힘들고 어렵게 등산해 보기도 처음인것 같았다.
산을 다 내려와 비선대에 도착 할때쯤엔 평소에도 그리 수월하게 다니던 산이 아니지만
그 여인이나 나나 지칠대로 지쳐버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로 힘든 산행이었다.
비선대에서 설악 호텔까지 3km정도의 길을 평소같으면 20분만에 올 거리가 왜 이리도
멀기만한지.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않는 지겨운길을 걷고 걸어서 드디어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을때
우리는(또?)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수가 있었다.
3편으로 넘어가자.
다음엔 여인의 유혹편.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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