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아들을 먼저 보냈다. 3 그 후기
인천백작
2025. 3. 1. 19:31
안좋은 일 한가지가 발생하면 남은 사람들은 그 반대되는
좋은점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행,불행을 상쇄 시켜야
견딜수 있다는것을 절실히 다시금 깨닫는 경험이 되었다.
그래.
아들의 죽음.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의 입장에서야 이보다 더 슬픈일이
어디에 또 있을까.
그 비통함을 말로 표현할수 있다면 어떤 말로 표현이될까?
그래.
죽음.
그러나 마냥 슬퍼하기만 해서야 그 쓰라린 속이 달래질수 없는것.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이야 당연히 슬프지만 반대로.
이제 기나긴 고통에서 해방된것 아닌가.
그렇게 가족끼리 이야기 나누며 억지로하고 위안하기로 했는데
사실 그렇게 맘 먹는다고 금방 위안으로 해결이야 되겠나만.
18일 장례를 치르고 유골은 생전에 아들이 말하던 장소에서 고이
자연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처음 폐선암 4기 진단 받았단 그말에 크나 큰 충격받고 3일을 울었고,
고통으로 몸부림칠때 해줄수있는 방법을 찾을수없는 안타까움에
울었고.
이제 아무런 희망이 없기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이원할때 또
울었으며.
사망 순간에, 염 하여 입관할때, 연화장 화구에 관이 입장할때,
분쇄한 유골을 받아들때, 자연으로 돌려 보내려 유골을 뿌릴때,
그곳에 3일간 머물다 삼오제 지낼때 내게도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새삼 깨달을만큼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 날때마다 눈에는 안개가 촉촉히 서린다.
그리고 아내는 아들이 살던 집 계약 기간이 3월 말까지니 그때까지
아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 집에서 생활하며 49제 날까지 있지는
못하지만 사자밥이라도 해주겠단다.
어미 맘이 그렇다는데야 말릴수 있겠나.
그저 어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를 바라면서 그리하라 해주었다.
그리고 24일 내게 전화해서 하는말.
너무 아들이 보고싶어 아들 보낸 그자리에 딸 가족들과 며칠동안
다녀 오겠다 하는데 어쩌나.
그러라 할수밖에.
25일 10시경 전화에 아들곁에 있노라 전화하는 목소리는 이미
젖을대로 푸욱 젖어 있었다.
그에대한 내 대답은,
"이보게 숙."
"4년동안 울어놓고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던가?"
"이젠 그만 울어도 될때 아닐까?"
"아마 아들도 어서 엄마가 헤어나기를 바라지 않겠어?"
"그러니 이제........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나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언제 꺼냈는지 손에들린 손수건은 이미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래.
숙.
울고싶어?
그러면 울어.
속이 풀릴때까지.
안울고 참으면 속에 병들어.
우리 싫컷 울만큼 울고 어서 평상으로 돌아가자.
힘들지?
여기 남편 있어.
내게 기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께.
사랑해.
숙.
씨이.
또 눈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