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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먼저 보냈다. 2

인천백작 2025. 2. 28. 19:18

 그렇게 3일을 울었다.

암 4기라니.

말기는 아예 손 써볼수도 없는 상태이지만 4기는 그나마 희망이라도

걸어볼수 있는거란다.

 

그렇게 병원에서 괘씸하기 짝이없는 진단 결과를 들은날,

곧바로 서울의 전문 암 병원에 예약을하고 며칠후 아내와 딸이

아들과 방문.

검사 하기전 담당 여의사에게 먼저 병원에서 의사의 말을 전했더니

이 여의사 화를 벌컥 내면서 한마디 하더란다.

세상에 희망없는 병이라니,

그런 말은 신경 쓰지말고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렇게해서 기나긴 암 투병이 시작되었다.

 

사실 희망?

나는 진작에 접어두었지만 아들에겐 최선을 다해보자 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내와 딸과는 결과에따른 후속 조치에대해 상의하며 나날을 지켜보았다.

현실은 냉정하게 봐야만 하니까.

 

자그마치 2개월 모자란 4년이다.

현대 의학에서 할수있는 방법은 다 써봤다 하였다.

신약부터 치료법까지.

그러나 한달 한해 더 깊어지는 병은 막지 못했다.

 

한번 C.T 촬영에 암세포 분포가 여기까지,

한달후 또 촬영 해보면 더 넓게 퍼져버린 암세포.

그 지독한 진통제를 다량 복용 하면서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들.

그래도 가족들 앞에 티를 안내려고 애쓰는 모습을보며 남은 가족들도

속으로 몸부림 쳐야만했다.

그 고통이 내 몸에 전이된듯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이젠 정말 끝이 보이는 어느날.

마지막 C.T 촬영결과 간은 완전히 암으로 뒤덮여 정상 세포가 없고,

신장은 진작에 그 기능이 정지 되었단다.

그래서 2월 10일.

용인의 호스피스 병원으로 이원하여 마지막 투병을 이어 나갔다.

곁에는 엄마인 우리 숙이 지키고.

 

그렇게 일주일후.

16일 오후 2시.

 

마지막 눈길을 힘없이 뜨면서 주변을 둘러보며 아들은 그렇게 떠났다.

 

연화장에서 화구를향해 들어가는 아들의 관을보며 아무리 참으려해도

참아지지않는 눈물을 쏟아야만 했었다.

 

그렇게 아들은 떠났다.

 

비록 곁에 없어도 아들아.

변합없이 사랑한다.

이제 고통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려마.

곧 우리 모두 같이 보게 될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말고.

알았지?

 

추가: 

아들은 진작에 혼자 나가 자취를하며 지냈다.

같은 시내에서.

 

그러다 병이 들어도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하며 지내다가 사망 4개월 전부터

엄마가 그 방에서 함께 생활하며 간병을 해왔다.

 

그러데 이녀석 그 고통의 와중에도 따로 분가 신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기초생활 수급자를 신청하여 허가를 받아 놓았다.

자기가 갖고있던 승용차는 누나에게 주어 버리고.

 

그 덕에 암병원 마지막 열흘 입원비가 실비로 청구 되었으며

호스피스 병동의 일주일 입원비는 전체 무료.

연화장 사용료 또한 무료로 진행할수 있었다.

 

그렇게 혜택을주는 정부도 고맙지만 자신의 사후에도 남은 가족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어주려 노력한 아들이 너무 기특하다.

그 돈 액수의 크고 작음이나 내 부담 능력의 유무가  문제 아니라.

 

새삼 고맙다.

내 아들.